|예순 여섯번째 마당| 의약품 유통의 '날개' 어그리제이션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불볕더위가 온종일 기승입니다. 찬 물로 샤워를 해도 찜통 더위에 답답한 여름은 변함이 없네요.

이번 '뉴스따라잡기'의 화두도 제약사와 도매업소에게는 왠지 묵은 근심처럼 답답한 '그것'인데요, 내년부터 시행될 지정·전문 의약품 일련번호(Serialization) 표시 의무화를 둘러싼 중요 이슈인 '어그리제이션(aggregation)'을 꺼내볼까 합니다.

어그리제이션을 말하기 전에 먼저 일련번호가 뭔지 간단히 말씀드릴게요. 일련번호는 쉽게 말해 의약품의 생산, 판매, 투약까지 유통 정보의 총 흐름을 하나의 바코드에 담아 놓는 일종의 이력 추적 수단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의약품 이력 추적은 느닷없는 일은 아니에요. 정부는 이 제도를 수년 전부터 시행하기로 하고 업계에 설비를 갖추라고 독려했는데, 워낙 걸림돌이 많았던 사안이었죠.

정부는 2007년 의약품관리정보화사업을 시작으로 2012년 지정약 수량보고 의무화, 지정·전문약 유통일자 제조번호 의무화를 거쳐 내년 지정·전문약 일련번호 표시 의무화 진행을 계획하면서 단계적인 로드맵을 설계했습니다.

올 초까지 이 사안을 둘러싼 업계의 고민은 '과연 이 일련번호를 어떤 시스템으로 담아낼까'였죠.

효과 좋은 것으로 소문난 RFID(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를 쓰자니 초기 투자비용이 비싸 엄두가 안나고, 2D 바코드를 쓰자니 효율성이 걸리고…. 업계는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었어요.

여기서 제기된 방안이 바로 어그리제이션이에요. RFID는 안에 어떤 내용물이 있든지, 크기에 상관없이 포장을 뜯지 않고도 현미경처럼 들여다보는 듯 설계돼 유용했지만, 2D 바코드는 한계가 있었어요.

예를 들어 한 도도매 업소가 다른 도매 업소에서 주문을 받아 A약과 B약, C약을 각각 30개씩 한 박스에 넣었다면, 이를 출고할 때 한 번에 읽어낼 수 있어야 하죠.

약을 받은 도매 업소 또한 포장을 뜯지 않고 한 번에 검수해 이 박스에 어떤 약이 몇 개 들어있는 지 파악해야 하고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하루에도 수백, 수천개의 약제가 유통되는 제약 현장에서는 '별 것'인 셈이에요. 일련번호 표시가 의무화되면서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시스템을 저렴하게 구입하기 위해서는 제반 사항이 뒷받침해 줘야 한다는 의미죠.

어그리제이션은 2D 바코드의 문제점인 묶음포장 단위에서도 그 내용물을 개개별로 파악할 수 있는 차선책인 셈이에요. 박스에 내용물을 대표할 바코드를 표기하고 이를 2D로 읽어내면 그 안에 내용물을 모두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죠.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설비를 위한 표준 가이드라인에 이 어그리제이션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행정당국에 강하게 요청했고, 복지부와 심사평가원은 이를 수용했어요.

지난 5월 30일, 이 내용을 담은 표준 가이드라인이 나오면서 제약사와 도매업소들이 설비를 갖추는 데 참고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이해하신 독자 여러분, 혹시 '기자가 우리 말 놔두고 왜 영어를 쓰지?'라는 생각 드셨나요? 그렇다면 제대로 읽으신 겁니다.

어그리제이션의 사전적 의미는 '집합체' 또는 '집합'이지만, 가이드라인 설계 전까지 '묶음포장단위' 또는 '박스 코드' '대표 코드' 등 여러 말로 혼용됐어요.

앞서 설명해드린 묶음 포장에 가까운 탓인데, 사실 정부와 업계는 이 뜨거운 화두 어그리제이션을 아직도 영어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요. 우리 실정에 맞게 번역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죠.

기자인 저 또한 이 용어를 우리말로 어떻게 풀어야 할 지 틈틈히 취재했지만, 전문가들조차 아직도 토론거리로 삼을 만큼 적절한 우리말을 찾는 게 쉽지 않다고 하네요.

며칠 전 의약품관리종합정보센터 측에 문의해보니 '포장집합'으로 이해하는게 맞다고 설명해주시더군요.

가이드라인의 주요 쟁점사항이었던 어그리제이션이 허용됐지만 이는 의무사항이 아닌 '옵션' 즉 선택사항입니다.

왜냐하면 박스 묶음 포장은 업소마다 판매 의도에 따라 임의로 단위를 설정할 수 있기 때문에 박스 크기나 내용물의 수량 등을 표준화시키지 않는 한, 그 종류는 제각각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죠.

복지부와 정보센터도 업소의 재량을 강제화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반드시 필요하지만 옵션일 수 밖에 없다고 설명합니다.

어그리제이션을 채택하는 업소들은 이제 코드 나열법과 표기법, 붙이는 위치 등에 대해 추가적으로 숙지해야 합니다.

5개월 남짓한 지정·전문약 일련번호 의무화제도, 업계의 선전을 기원하는 것이 곧 의약품 투명화의 지름길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