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번째 마당| 약은 어떻게 만들어져 폐기되나

그는 이제 체념한 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조금 있으면 뜨거운 화마 앞에 그의 생명력은 다할 것이다.

의약품 폐기업체 소각장까지 오는동안 약(Drug)씨는 3년간의 짧은 일생을 돌아봤다. 어쩌면 그도 의사의 선택을 받아 삶의 목표를 이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폐기처분의 운명도 가치가 있으니까.

약 씨가 태어난 건 3년전 어느 의약품 공장이었다. 똑같은 몸을 가진 친구들도 약 씨와 함께 태어났다. 그들은 기계들의 움직임이 똑같이 세번 반복해 동일하게 태어났다는 걸 입증한 끝에 탄생했다.

만약 세번의 반복 속에 어느 하나라도 빗나갔다면 곧바로 약씨는 폐기처분될 운명이었다. 다행히도 그와 친구들을 만들어내는 과정들이 정확하고 균일했었기에 버려지지 않았다.

열과 충격에는 잘 버티는지 몇가지 검사도 통과했다. 이제 세상과 만날 시간이었다. 이별의 순간 조물주는 말했다. "넌 인간이 아플 때 꼭 필요한 존재가 될 거라고".

약 씨의 수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3년. 그의 옷에는 수명은 물론 앞으로 하게 될 일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약 씨의 역할은 아픈 환자의 혈압을 낮추는 것이다.

공장을 떠나 작은 도매업체에 도착했다. 마치 출입심사를 받는 것처럼 출신을 체크하고, 꼼꼼한 몸탐색이 이어졌다. 그곳에서 그는 철제로 된 선반에서 친구들과 며칠을 함께했다.

마침내 그곳을 빠져나갔을 때 약 씨는 본연의 역할을 달성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약국 조제실에서 친구들이 하나둘씩 떠나갈 때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확신은 점점 희미해져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에게도 기회가 왔다. 약사가 그를 집어든 것이다. '이제 곧 약사의 손을 거쳐 다른 색깔의 친구들과 함께 고혈압 환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은 약씨가 3년전 태어난 공장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조물주가 말했다. "너를 찾는 사람이 없었다. 미안하다."

약 씨는 다시 보내달라고 애원했다.

조물주는 완강했다. "넌 많이 늙었어. 다시 돌아가도 약효가 통할리 없어. 다시 보내려면 너가 이상이 없는지 검사를 해야해. 우리는 피곤하고 이제 그럴 여력이 없어. 미안하다."

약 씨는 철제 선반에서 만난 한 늙은 친구는 수명이 다 됐는데도 공장에서 새 옷을 입고 나왔다며 본인도 그렇게 해달라고 다시한번 사정했다.

"그건 범죄행위야. 널 그렇게 사용하려고 여러 품질시험을 거쳐 세번이나 동일 공정을 통해 만든게 아냐. 넌 태어날 때부터 엄격한 기준이 적용됐고, 세상에 나가서도 그 기준은 유효해." 유효기간이 다한 약씨는 폐기처분될 수 밖에 없다고 조물주는 말했다.

낙담한 약 씨에게 조물주는 부모 후보물질의 얘기를 들려줬다. 그가 태어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거쳤는지.

화합물로 이뤄진 부모는 동물에게 먹혀 안전하다는 걸 입증한 다음 약효를 검증하기 위해 많은 인간들의 시험을 거쳤다.

"너를 낳기 위해 10년 이상의 세월 동안 네 부모는 시험을 통과해야 했어. 너는 3년의 짧은 인생을 마감하지만 절대 가치없지는 않았어. 그 10년의 결과물이 바로 너니까." 조물주는 부모 후보물질이 인내의 세월을 버틴건 순전히 약 씨가 인간을 위해 쓰여지길 바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활활 타오르는 소각로 앞에서 약 씨는 깨달았다. 자신의 역할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고, 수명이 다했기에 사람들을 위해 폐기돼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부모가 10년을 바친 이유라는 것을…. 약 씨는 담담하게 불 속으로 들어갔다.